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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 목소리로
지은이 : 오양진
출판사 : 황금알
발행일 : 2013년 3월 18일
사양 : 216쪽 | 152*225
ISBN : 978-89-97318-39-1-03810
분야 : 인문
정가 : 15,000원
비평집 『쉰 목소리로』에서 비평적 사유는 미학과 도덕의 관계에 집중되고 있다.
이 관계의 역사적 변화는 그러한 비평적 주제를 불가피한 것으로 만든다. 고전주의는 도덕이 미학을 결정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미학은 도덕과 관계가 없다며 미학적 자율성을 선포했던 것은 낭만주의자들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낭만주의적 매개 속에서 제3의 것을 신봉하게 되었는데, 미학이 도덕을 결정한다는 도그마가 그것이다. 이제 우리는 미학적으로 성공할 때에만 예술작품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며 그 작품에 들어 있는 지적 내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예술적 감각만을 존중하려는 그러한 욕망 안에서 그 내용은 무엇이든 지지할 만하며 잘못된 견해라도 진실과 대등한 또 하나의 진실로 선언된다. 실제로 모든 판단을 미학적 감수성에만 의존함으로써 우리는 상대주의를 분별없이 일종의 시대정신이자 민주적인 관용의 지적이고 이념적인 표출로서 고무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대에 비평은 절실한 것이 아닐 수 없는데, 여기서 사정은 오히려 더 심각해진다. 이것은 특히 문학비평에서 전형적이다. 최근에 새로운 미학적 풍조에 합류하는 문학적 독트린을 표명할 경우에 한해서 그 문학작품을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평론가들만이 중요시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즘 평론가들은 정의를 결정하는 주체가 미학이기를 주장하고, 또 그 미학이 문학을 결정하기를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특정한 것에의 집착을 북돋우고 보편적인 감정을 전체주의적인 것이라고 지탄한다. 타인과 구분되려는 사람들의 자기애에 아첨하면서 보편성 속에서 처신하려는 모든 경향을 경멸하는 것인데, 심지어 이기주의에 높은 도덕성이 있다고 공언하기조차 한다. 오늘의 비평은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대접함으로써 그들이 입맛당기는 음식만 먹도록 하고 실제 영양가로는 무엇이 좋은지 가르칠 것은 염두에 두지 않는 시인과 작가들의 역할을 찬양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것은 종종 모든 문학은 다 훌륭하다며 개성을 존중하는 낭만주의적 가정과 결합됨으로써 최근의 문학비평을 조금 더 격하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모든 문학작품이 다 비평적 호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가정하는 한, 좋은 문학비평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그러한 민주주의적 가정에서 출발해 공허한 수사학의 절벽 끝으로 내몰리게 된 비평가들을 근래에 들어 많이 보게 된다. 그리고 작품성의 높낮이와 상관없이 문학작품들을 상대화시키면서 단순하게 칭찬해 왔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한 가치를 지닌 작품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문학적으로 불행한 사태도 생겨나고 있다.
실질적으로 출판 상업주의에 기초한 그러한 호의적 비평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인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비교 기준으로 작용할 수 있는 혹평 내지 악평을 만들어내면서 기존의 비평적 흐름을 반성할 수 있는 문학적 시야를 새로이 개방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이 비평집은 바로 그러한 혹평의 논리에 입각해 쓰인 10편의 에세이를 묶은 작은 책이다. 이 에세이들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이러하다. 즉 좋은 문학과 나쁜 문학을 구분하는 가치의 문제가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오늘날 문학평론가들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개성의 이념은 그런 가치의 문제를 폐기함으로써 점증하는 문화적 타락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저자의 비평은 혹평, 혹은 악평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가끔 텍스트에서 물러나 그것의 도덕적 목적을 살피고, 문학작품을 고립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회적인 결과의 원인이나 징후가 되는 것으로 간주하며, 나아가 모든 문학이나 문화가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비평적 편견의 문제점과 이것이 초래한 한국사회의 문화 병리학을 비판하고 가치와 판단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말할 것도 없이, 비평이 검열을 할 수는 없지만 혹평은 할 수 있다.
 
 
차이에 대한 존중, 판단으로부터의 도피, 이것이 현대의 유행이다. 천박한 대중문화와 거짓된 깊이의 문학작품을 언어의 채찍으로 닦아세웠던 진지한 문학비평이 지젝식 문화비평이나 <위대한 탄생>류의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광고 이미지에 대한 순진한 사회비평에 점점 더 밀려나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대중주의는 권력이란 이미 그 자체로 나쁜 것이라는, 상대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 판단착오 속에서 그나마 온전했던 문학의 영역마저 잠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들려오는 것은 무엇보다도 충격과 물의의 효과를 문학작품의 효과로 간주하는 속류 아방가르드들의 기회주의적 환호성이다.
결국 나의 비평적 외침은 그 비열한 환호성에 파묻히고 또 곧 ‘목이 쉬어’ 가라앉을 것이 틀림없다. 사실 문학의 곤경을 가리키는 나의 ‘쉰 목소리’에서 문학비평의 잊혀진 의무를 떠올리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미래가 없이 패배의 몸을 길게 눕히고 있는 것”을 위해 나는 다시금 목이 쉬도록 외친다. 하지만 이것이 문학적 관점에서는 아마도 다소 격이 낮은 것임은 인정한다.
이제 예술의 권좌에는 대중예술인 영화가 앉아 있고, 엘리트주의의 소산으로 단죄된 문학은 그 아래 부복해 있다. 이상과 진실에 대한 확신이 이미지와 환상에 대한 신뢰로 대체된 아이러니와 모호성의 시대에 그러한 구도는 불가피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사상을 축소하고, 우리 시대의 음란하고 도착적인 관심들에 부역할 반지성주의를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문화의 폐경기를 이끌 공산이 크다. 이 점은 무엇보다 영화비평에서 징후적인데, 실제로 영화비평을 대할 때면 비평인지 선전인지 구분이 안 갈 때가 많다. 그것은 내부자들이 떠드는 평가와 정보일 따름이다.(특히 그들은 베데커식 별점제를 선호한다.) 영화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에 대한 진정한 판단은 별로 없다.
요즘 영화를 감상하는 일이 갑자기 독서와 사색의 동격으로 취급되며 지적인 노동의 하나로 간주되는 것 같은데, 이것은 물론 영화의 질이 높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의 기준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의 폐허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을 때, 그것은 위기감을 주기도 하지만,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의욕을 불어넣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미 산산이 깨져 버린 문화의 파편들을 쓸어버리고 오랜 전통 속에서 확고한 신뢰를 쌓은, 믿음직한 옛것들을 가지고 새로이 시작하는 것은 어떻겠는가? 진정한 고전들이 비평가의 의식과 만나면, 그의 마음과 정신의 어떤 것이 다시금 뜨겁게 타오르게 된다.
여기서 비평가는 무엇보다도 판단하는 존재로 거듭나는데, 조지 슈타이너가 지적한 것처럼, 이때 “비평가란 언뜻 보기에 흐릿하고 독단적으로 보이는 인식일지라도 이성과 모방 의식에 쉽게 접근시키는 사람이다.” 슈타이너는 비평가를 서평가와 구별하며, 비평가는 서평가와 달리 걸작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비평가의 기능은 단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일이 아니라, 좋은 것과 최상의 것을 구별하는 일이라는 것인데, 우리 문화의 현실을 놓고 보면 아마도 우리의 비평가는 그런 비평가를 자임하기 이전에 서평가의 의무부터 수행해야 할 것이다. 우리 문화를 타락시키는 가짜들의 마법을 풀어서 우리를 더 가난하지만 더 정직하게 만드는 일부터 말이다.
서평가가 혹평가가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혹평가로서의 서평가에 대한 불신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볼테르는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라는 자신의 철학적 로망스에서 한 신부의 입을 빌어 서평가를 다음과 같이 힐난한다.
“바로 살아 있는 악이지요. 그는 모든 작품들과 책들을 혹평하여 먹고 산답니다. 마치 내시가 바람둥이를 증오하듯이 그는 성공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증오하지요. 그야말로 욕설과 독으로 먹고 사는 문학의 독사지요. 바로 삼류 문사예요.”
그런가 하면 빌 핸더슨과 앙드레 버나드는 『악평』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서평가의 심리학을 조금 더 설득력 있게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왜 서평을 쓰는가?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분명 서평 쓰는 일이 다른 이의 작품들에 대해 심판을 내리면서 취향의 조정자 구실을 한다는 점에서 권력욕을 충족시킨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다른 이를 바보로 만들면서 자신은 똑똑해 보인다는 만족감이다.”
솔직해 말해, 다른 사람들이 괜찮다고 느끼거나 심지어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 속에서 결점을 찾고 비판하는 즐거움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영국의 비평가 테리 이글턴은 자신의 서평집 『반대자의 초상』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비평이라는 데는 더러 앙심이 끼어들기 쉬운데, 나 자신이 정기적으로 앙심 어린 비평의 대상이 되는 만큼 그것을 익히 알고 조심하는지라, 여기 실린 글 몇 편이 논쟁적이고 풍자적일 수는 있어도, 딱히 악의적이거나 불공정하지는 않으리라고 믿는다.”
나 역시 조심했고, 따라서 내 글이 악의적이거나 불공정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믿는다. 설사 악의와 불공정이 발견된다고 할지라도, 칭찬과 공격을 함께 받는다는 것이 시인과 소설가들에게 그렇게 괴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명성이란 배드민턴 공과 같다. 한쪽 끝에서만 공을 치면 곧 바닥에 떨어지게 마련이다. 공중에 떠 있기 위해서는 양쪽에서 같이 쳐줘야 한다.”라고 존슨 박사가 지적한 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칭찬과 공격을 함께 받는 것이 시인과 작가들에게 불쾌하고 손해가 나는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렇게 얘기해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의 한계는 분명하다. 진정한 비평가처럼 걸작에 관심을 갖는 것이 졸작에 대한 우회적인 비평이 되는 것이라면, 이처럼 지면을 낭비할 필요는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고의 작품은 아니더라도 좋은 작품들이 졸작에 파묻혀 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정녕 얘기가 다르지 않겠는가. 정말이지 졸작들을 걷어내고 그 가운데 묻혀 있는 좋은 작품들이 드러날 수 있는 상황을 구축하는 것이 쓸모없는 짓이 되겠는가. ‘만약 이 책에 약점이 있다면 평가에 비해 분석이 약하고, 분석에 비해 서술은 더 약하다는 점이리라.’ 하지만 이렇게 변명을 늘어놓고도 내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나의 스승은 언젠가 다음과 같이 충고하셨기 때문이다.
“나쁜 것과 악한 힘을 완전히 없애려고 하는 노력은 어리석은 것이어서 쉽게 절망감이나 독선에 빠지기 쉽다. 나쁘고 악한 것의 존재를 견디지 못하고 그것들을 일시에 박멸하려는 조바심은 그 자체가 나쁜 힘이 될 가능성이 있다. 나쁜 것과 악한 힘은 거친 마음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고운 마음으로 덮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이 책에서 나는 ‘고운 마음’의 비평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스승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나도 언젠가는 모두가 좋아하는, 나만의 걸작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 “오월의 멧새”를.
오양진 평론가는 1969년 인천에서 태어나 고려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00년 중앙일보사가 주관한 제1회 중앙신인문학 평론부문에 당선되어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특히 문학 비평을 사회 비평과 결합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현재 고려대에 출강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소설의 비인간화』(월인, 2008), 『중심의 옹호』(서정시학, 2008), 『데카당스』(연세대출판부, 2008), 『문학적 서사와 서사적 문화』(한국학술정보, 2013) 등이 있고, 그 외에도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6 ? 들어가는 말
13 ? 마음의 생태학적 도착
31 ? 문학의 곤경
61 ? 사이코패스의 소설
87 ? 시의 이데올로기
105 ? 사랑의 비유들
121 ? 자기연민의 유혹
139 ? 시와 윤리
153 ? 인생의 조건
173 ? 위선의 옹호
193 ? 소설의 향기
209 ? 나오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