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생을 정리하고 새 터전에서 십수 년. 수행하듯 살아온 시인은 초월한 듯 아니한 듯, 자연의 암시를 간파한 듯하다. 자신의 내부에 새로운 자연의 리듬을 세운 것 같기 때문이다. 분별심의 촉수를 제거했으니, 세상일을 여여如如하게 받아들이겠다는 뜻이 전해온다.
시인에게 궁극적인 자세는 모든 것을 내어주려는 ‘보시’가 아닌지 모르겠다.
다 비우고 내어주어 더는 줄 것이 없을 때, 육신공양을 하던가. 시인은 장작더미에서 완전한 인격체를 발견한 듯하다. 시인이 꿈꾸는 것이 최후의 공양이라면, 시인의 이상향은 부처로 꿈꾸기인가, 아니면 부처의 꿈인가. 누가 이상향은 꿈속에만 있다고 했던가. 시인에게 시창작의 지향점이 이상理想에 있다면, “저 평온한 불상”은 언어로 포장된 시인의 꿈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 전광호(知音, 부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