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해야 멀리 보인다. 눈도 멀리 가고, 걸음도 멀리 간다. 관심觀心, 즉 마음이 고요할 때 사물이 보이고, 대상과 세계가 열린다. 분별과 시비, 대립과 반목은 시끄러운 유심이 빚은 결과다.
산은 침묵과 고요다. 그것은 사상적 기틀이며 사유의 토대가 된다. 은사隱士와 명철名哲, 인자仁者가 산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고요는 맑은 물(마음)이다. 맑은 물은 설사 엎질러진다 해도 얼룩이 남지 않는다. 담박한 그 물이 열린 대상과 세계를 비춘다.
인간의 진화, 무한한 세계에의 개안은 순전히 지평에 닿은 그 사유의 걸음 덕분이다. 걸음이 전방위적 길이다. 촘촘한 사유의 걸음은 그물이다. 그 그물로 물을 담을 수도 있다. 어디 그뿐이랴. 활달한 우주적 사유는 날개를 달고 저 먼 별세계로 휘적휘적 날아갈 수도 있다. 이와 같은 걸음의 두 발은 성찰과 사유다. 자신을 밀어가는 수레다. 압축하면, 걸음은 즉자며 대자다. 걸음은 늘 대상과 세계를 지향하지만 항상 자신을 향한다. 내가 먼저 나 자신에게 이르지 않고 건너갈 수 있는 대상과 세계는 없다. 결국 걸음의 궁극은 나 자신이며, 나의 궁극은 산이다.
- 「자작시 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