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란 시인은 전 지구적 생태 위기에 맞서 싸우려는 생태론적 담론을 펼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생의 문제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겉으로 지극히 평온해 보이고 안정되어 있는 지상의 삶 이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참사와 고난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표면의 편안함에 갇혀 이면의 불편함을 보는 눈을 잃어버렸거나 보려는 마음의 문을 아예 닫아버렸다. 그러나 접신한 영매에게는 생의 이면이 보이듯이 예민한 시인의 눈에도 생의 착잡한 단층이 들여다보인다.
그가 보기에 우리의 생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에도” 밥을 먹고 “깡마른 육체의 무더기를 떠올리면서도/ 횟집을 서성이며 생선의 살을 파먹”(「아우슈비츠 이후」)는 것이 우리 사람이다. “온몸을 바쳐 발가벗고 앉아”(「주꾸미」) 있는 새끼주꾸미를 질근질근 씹어 먹고 “손으로 땅을 떠받치고 물구나무 선 채”(「닭발」) 걷던 닭발을 오독오독 빨아 먹는 것이 또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주린 배는 수탈의 전제가 되고 먹을거리가 사라진 텅 빈 접시가 오히려 풍요가 된다. 그런가 하면 “달콤한 맛에 지옥이 함께 있다”(「위험한 밥상」)는 사실을 모르고 물엿의 달콤함에 현혹되어 물엿병에 빠져 죽은 개미들이 있다. 그러나 어찌 개미만이겠는가. “산다는 건 결국 그렇게 위험한 밥상을 구하는 일”이 아니던가. 쥐약 섞인 고구마를 먹은 강아지가 죽어가는 마당에 꽃들은 흐드러지게 피어 하루 종일 웃고 있고, 그런 것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어머니는 울타리에 빨래를 널고 뇌수술을 한 아버지는 딸을 여보라고 부른다(「모순에 대하여」). 이처럼 세상은 모순에 가득 차 있다. 아니, 생은 모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은 시집 속에 많은 경험을 녹여 넣었다. 병중의 가족을 수발하며 느낀 사연들, 병원 응급실에서 보았던 처참하고 무기력한 생의 단면들, 돌아가신 아버지를 간병하던 때의 아픈 회억, 친지와 이웃들의 쓰라린 체험들, 정신이상에 시달리던 언니의 기구한 죽음 등 가혹한 내력들이 시인의 주변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다양한 체험이 시인에게 생의 저층과 이면을 두루 보는 시각을 갖게 하면서 소위 비극적 세계 인식이라고 하는 틀을 의식의 안쪽에 심어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독특한 체험의 시편에 은밀히 내장되어 있다.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의 작품해설과 신경림, 고형렬 시인의 발문이 있다.
최명란 시에 있어 영감의 샘은 현실이다. 있는 현실을 그대로 시로 쓰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를 찾아내고 활기 있는 언어를 포착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현실이 단순하듯 때로는 단순하고 현실이 복잡하듯 때로는 복잡하다. 성적 담론도 마다하지 않으며, 당돌한 비유도 피하지 않는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편하고 쉽게 읽히는 점도 그의 시가 가진 미덕이다.
- 신경림(시인)
문자 속에 씨앗의 호흡음(呼吸音)이 깨어진다. 조용히 울 곳을 찾아가는 시인의 마음속에 누추한 삶이 어른대며 언어는 이 육체와 대척한다. 모든 환상을 삼키는 죽음의 그림자가 칸막이를 친 까닭에 예외 없는 모든 생은 통과 불가한 투명한 폐부의 깊은 내면에서 파상(波狀)한다. 이것이 최명란의 생에 대한 가혹한 간섭 즉 ‘끼어듦’ ‘지우기’ ‘파기(破棄)’의 변주들이다. 입문에 있지 않고 심연으로 그의 시는 훌쩍 떠난 것 같다. 칼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고 사육당하는 타인으로서의 자신의 생은 찢어진 채 텅 빈 한 그루의 영혼으로 기억을 감내하고 무극한 인간의 중심을 향해 빛을 비추고 서 있다.
- 고형렬(시인) |